Now Boarding
회피메리지
코이
너희 결혼은 안 할 거야?
해야지.
언제?
언젠가는.
연애하는 10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해왔던 레퍼토리다. 그리고 항상 두루뭉술하게 대답해온 언젠가는. 10년째가 되니까 이제는 구체성 있는 대답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좀 오래 걸리긴 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다들 얼큰해지면 너네 헤어져도 우정은 변치 말자는 소리가 막잔 건배사로 장식되곤 했다. 고딩 때부터 친구들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있으면 집어먹는 마른안주처럼 가볍게 씹히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2년 전, 대학 동기의 결혼식 뒤풀이에서 어떤 선배가 술 마시고 떠들어대던 말이 생각난다. 결혼이 백년가약이잖아. 백 년 동안 한 사람이랑만 붙어먹으래. 이건 진짜 미친 짓이지. 얘들아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 알았지?
남의 잔칫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참. 바람 나서 이혼했단 얘길 들은 참이라 그냥 흘러들었는데 결혼에 대해 깊생 하다 보니 곱씹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결혼은 신중히. 결혼을 괜히 인륜지대사라 하겠는가. 자유로웠던 두 사람의 인생이 하나로 묶이는 종신계약과도 같은 거라 연애보다는 훨씬 부담스럽긴 했다.
연애 10년 차. 그중에 절반을 함께 살았다.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지만, 10년을 만났어도 여전히 불확실한 사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년을 만났음에도 안달이 나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곁에 두려면 결혼 말곤 다른 답이 없다. 그치만 결혼이란 게 나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리쿠는 꽤 오랫동안 주파수를 맞춰 왔다. 들쑥날쑥한 잡음이 모두 사라지던 날. 이제는 정말 할 때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 거창하게 하는 것도 오글거려서 소박하게나마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대망의 프러포즈 데이. 눈물이 안날 줄 알았는데 주책맞게 오열하고 말았다. 10년 연애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탓이다. 무슨 에피소드가 원피스급이네. 긴 세월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쉬운 길에서 삽질하고, 복잡한 길은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그런 연애를 했다. 이게 다 한 치 앞만 보고 앞장서서 걷는 누구 때문이지만. 리쿠는 자신이 망원경으로 쓰이는 게 속 편했다. 그런데 그 망원경도 가끔씩 오작동을 일으키는 게 문제라서. 서로 조금 모자라고 조금 뛰어난 부분들을 맞춰가며 지나갔더니 얼렁뚱땅 일이 해결되기는 했다. 다 지나고 나서 그땐 그랬지, 웃어넘길 만큼 단단하게 영글었고. 함께라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리쿠는 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꼭 붙잡았다. 셀 수 없을 만큼 잡아본 손인데도 떨려죽겠다. 희고 가느다란 약지에 반지를 껴주는데 울컥해서 눈물이 팍 터졌다. 다 끝나고 울지. 지금 터질게 뭐람. 안아주는 품이 따뜻해서 더 울었다. 마주 안으려는데 진동하듯 떨리는 몸이 느껴진다. 뭐야... 너도 지금 울고 있어? 오... 이런. 울고만 있을 게 아니라 얘부터 달래줘야지. 벅찬 감정 억누르면서 젖은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순간,
오마에.
인생 하이라이트 순간에도 너란 녀석은.
두 사람의 배경으로 각자 상황에 걸맞은 음악이 흐른다. 주인공 인생 좆 될 때 흘러나오는 비장한 음악과 마찬가지로 좆 된 상황인데 그게 주인공이 아닌 악당일 때 흘러나오는 통쾌한 음악. 프러포즈 하느라 똥폼 잡고 꿇어앉아 수문 개방한 댐처럼 눈물 콧물 모두 방류한 한 남자의 얼굴이 푸석하게 메말라 가고 있었다.
제 딴에는 산통 깨지 않으려고 음소거한 건 칭찬할 만했지만, 기본적으로 웃을 때 보이는 치아 18개. 그런데 지금은 족히 20개는 넘어 보인다. 완전한 잇몸 개방. 활ㅡ짝.
"리크흡... 크하히힛."
"......"
"우니까 멋없어."
누군 북받쳐서 처울고, 누군 웃느라 처울고. 반지도 받아주고 청혼도 받아줬지만, 우리 연애사에 가장 찬란해야 할 순간은 불발된 폭죽처럼 아쉬운 순간으로 남았다. 그래도 이후 결혼 준비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적어도 리쿠의 눈에는 그래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메리지 블루라는 거 흔히 겪을 수 있는 증상이라곤 하지만, 그게 제 연인에게도 해당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 날짜가 잡히고 얕은 우울에 빠져가던 녀석은 점점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리쿠는 날마다 그를 건져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한순간에 변할 수도 있고 망가질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제 사람을 통해 깨닫고 싶진 않았다. 한낱 감정에 쉽게 매몰되지 않던 녀석이 이러니까 더 겁이 났던 거 같다.
자꾸 비집고 들어오려는 나쁜 생각을 애써 무시하고 온 신경을 쏟았다. 밤낮없이 센서가 달린 듯 작은 인기척에도 반응했다. 리듬이 깨지고 피로가 누적된 것도 모른 채 리쿠는 어떻게든 우리를 지켜내고 싶었다. 단 한순간. 거의 기절이었지. 까무룩 잠들었던 그날, 녀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람 쐬고 온다는 쪽지 한 장만 띨롱 남겨둔 채 기어이 아가미를 열고 잠수를 탔다.
그렇게 토낀 금쪽같은 반쪽을 찾아다닌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다. 처음엔 일본에서만 자잘하게 옮겨 다녔는데 세 번쯤 찾아냈더니 해외로 구역 확장해버린 웬수 같은 반쪽.
마에다 리쿠는 증기 뿜어내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흥신소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번엔 꽤 어렵게 찾았습니다. 염색을 또 하셔서 못 알아볼 뻔했거든요. 헛웃음이 난다. 지가 무슨 카멜레온도 아니고 머리털은 왜 자꾸 바꿔대고 지랄인지. 이번에 만나면 머리털부터 죄다 밀어버리든가 해야지. 빡빡이여도 귀여운... 짝짝짝.
이것은 박수 치는 소리가 아니다. 애정과 증오가 비례하는 연인 생각으로 습관적 웃음을 짓는 안면 근육에 매타작 갈기는 소리다. 정신 차려라. 뒤통수를 그렇게 처맞고도 귀엽다는 생각을 하냐. 이번엔 진짜 담판을 지으러 가는 거다. 붙잡아다 결혼을 하든, 파혼을 하든. 더는 피 말리는 술래잡기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리쿠는 흥신소 탐정이 적어준 종이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냈다. 성질나서 꼬깃꼬깃 구겨버린 종이를 다시 펴느라 사서 고생 중이다.
• 의뢰 대상 : 토쿠노 유우시
-현재 대만 타이베이 중정구 G 호텔 투숙 중
-시먼딩 소품점 샤오마오 근무 (13:00~17:00)
• 주로 가는 곳(★단골)
- 시먼딩 : TOMATO(훈툰,토달볶)★
- 시먼딩 : ***(우육면)
- 시먼딩 : ***(버블티)
- 난지창야시장 : ***(물만두)
- 닝샤야시장 : ***(고구마볼,오징어튀김)
다 읽고 난 쪽지를 이번엔 곱게 접어서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 든 것을 꺼내서 확인한 리쿠는 기가 찼다. 치아는 안 보이지만, 발그레한 볼이 살짝 솟아오를 정도로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제 연인의 얼굴이 어쩐지 수줍어 보였으므로.
치앙마이에서는 무난한 갈발, 다낭에서는 찌르면 파란 피가 나올 거 같은 머리라 적응이 안 됐는데 이번에 바꾼 머리색은 퍽 잘 어울려서 눈길이 갔다. 금발로 물들이고 살짝 다듬어서 동글동글한 머리통, 동그란 뿔테안경을 쓰고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정말이지... 존나게 귀엽다. 이 귀여운 얼굴을 대체 어떤 새끼한테 보여주고 있는 거야. 다낭에서 해피 벌룬 빨고 실실 쪼개던 얼굴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말 사랑해 마지않는, 뽀뽀를 참을 수 없는 얼굴.
어느 순간부터 사진 속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손가락이 처량해 보인다. 하아. 묵직한 숨을 허공에 뿌리며 핸드폰을 꺼내든 리쿠는 제일 빨리 출발하는 타이베이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
와, 디지게 덥네. 타오위안 공항에서 픽업 택시를 타는 짧은 순간 체감한 대만 날씨는 혀를 내두르게 했다. 얘는 왜 더운 나라로만 다니는 걸까. 추운 거 싫어하는 거 잘 알지만, 더운 거 못 견디는 리쿠에게 대만의 여름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적정 사우나 온도를 넘어섰다. 애초에 이 나라까지 오기 전에 하네스라도 채워서 잡아두는 건데. 너 지금 방심했네? 어디 한번 좆돼봐. 이런 식의 운영 정말 지긋지긋하다.
다 잡은 녀석을 공항에서 또 놓쳤을 때는 진짜로? 깜카 아니고 진짜, 리얼, 실제 상황? 리쿠는 집으로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했다. 꼴딱꼴딱, 숨넘어갈 때쯤 누나가 엽서 하나를 손에 쥐여줬다.
리쿠 기다려.
기다리라는 말이 전부였지만 홀연히 떠난 유우시가 처음 남겨준 메시지라 얌전히 기다렸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긴 하는데. 보고 싶어서 죽을 거 같을 때는 어떻게 해야 돼. 존재의 부재로 인한 상실과 공허함 따위 떠난 사람은 알기나 할까. 아는 놈이었으면 진작에 돌아왔겠지.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면 그걸로 며칠은 살아갈 수 있을 텐데. 너 이렇게 독한 구석이 있었네. 우리 이 정도로 떨어져 지낼 수 있다고 언제부터 생각했던 거야. 10년이나 겪었으니 너를 제일 잘 아는 건 나라고 자부했는데 참 경솔한 생각이었다. 드디어 완성이구나 싶었던 유우시 사용 설명서는 또 내용이 추가됐고 수정사항이 생겼다. 여전히 미완성이라 참고만 할 수 있는데. 지금 불안한 건 너를 덮친 파랑의 이유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 다 필요 없고 이것만 머릿속에 박아놔. 심각한 문제 아니야, 리쿠.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줄 네가 필요해.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가 돼 가자 기다리는 거 더는 무리. 그래서 유우시를 매번 찾아줬던 흥신소를 또 찾아갔다. CIRO 출신이라더니 탐정님 실력은 허언이 아니었고 유우시를 금방 찾아줬다. 물론 유우시가 핸드폰이며, 카드를 써대며 흔적을 많이 남기고 다녀서 찾기 쉬웠다곤 하지만 계속 쫓아다니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런데 도망도 계속 치다가 잡히다 보면 경험치가 쌓이고 스킬도 해금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유우시가 더는 본인 명의로 된 카드를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면서 먹고사는 거야.
비행기에서 쪽지를 닳도록 읽던 리쿠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가. 유우시는 제 걱정과 달리 머나먼 타국에서 일까지 하면서 생각보다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주로 간다는 곳에 전부 먹으러 가는지 메뉴 적혀 있는 거 보고는 실없이 웃어버려서 자존심이 상했다. 거기다 얼마나 들락거렸으면 단골까지 된 거야. 하여튼 유우시다웠다.
리쿠는 유우시가 머물고 있다는 G 호텔에 숙박했다. 처음 도망갔던 치앙마이 에어비앤비에서 엄지발가락만 한 벌레들의 습격을 겪고 제 이름을 울부짖으며 살충제를 뿌려대던 사건을 교훈 삼았는지 이제는 어딜 가든 호텔에서만 묵는다.
대만은 리쿠도 처음이라 푹 자고 일어난 다음날, 주요 관광지 투어를 시작했다. 융캉제에서 간단히 우육면으로 끼니 때우고 근처 공원을 산책하다가 택시를 타고 중정기념당으로 갔다. 이때부터 적당히 싸돌아다녔어야 했는데. 다음 목적지로 용산사 가서 구경하고, 근처 화시지예 야시장에서 루러우판 먹고 광저우제 야시장까지 구경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히 돌아다니느라 발이 아파서 야시장에서 발 마사지까지 받고 쌓인 피로를 풀자마자 이번엔 타이베이 101 전망대로 향했다. 타이베이의 야경을 담아내는 리쿠의 눈빛에 불꽃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고생이 취미인데 고생시키는 사람이 자리를 비워 그런지 남들 2, 3일 걸릴 일정을 하루 만에 소화해버렸다. 7월의 한여름 뙤약볕과 미저리처럼 들러붙는 습기를 몸에 두르고 특훈 받듯이 관광했던 리쿠는 결국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제대로 된 더위를 맛보고 과부하에 걸린 몸뚱이가 스스로 전원을 off 했다. 꼼짝도 못 하고 다음날은 하루 종일 호텔방에 누워 있었다. 그래도 몸만 힘들뿐이지 마음이 불안하거나 답답하거나 긴장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태평할 수 있는 이유도 어찌 됐든 유우시랑 같은 하늘 아래, 같은 호텔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겠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몰래 보러 갈 수 있으니까.
나흘째.
아직 몸 상태가 온전치 못했지만 리쿠는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오늘은 유우시를 미행할 생각이다. 나름 분장하고 1층 로비에서 숨어 있었다. 유우시가 언제 나올지 몰라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느라 하품이 연신 터진다. 하품 때문에 고인 눈물을 훔쳐내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금발머리가 시야에 잡혔다. 뻗친 머리 위로 빵모자 턱 얹고, 크로스백 양손으로 꼭 붙들고 걷는 폼이 딱 봐도 토쿠노 유우시. 현재 시간 아침 9시. 반가워할새도 없이 조금만 늦장 부렸어도 놓칠 뻔했단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평소 11시쯤 일어나는 녀석인데 어딜 가길래 아침 댓바람부터 나온 건지. 리쿠는 닌자처럼 따라붙었다.
개덥다 진짜. 숨이 턱턱 막힌다. 5분 걸었나.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유우시는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따라갔다가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유우시를 발견하고 급히 몸을 숨겼다. 자전거 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동네 한량처럼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유우시의 등짝만 멀거니 쳐다보던 리쿠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시먼딩이었다.
먼저 도착한 리쿠는 단골가게라던 TOMATO 근처에서 유우시를 기다렸다. 그냥 느낌에 여기로 올 거 같았다. 땀 뻘뻘 흘리면서 20분쯤 기다렸더니 자전거를 탄 유우시가 나타났다. 가게는 아직 오픈전이라 Close 팻말이 붙어있는데 익숙하게 자전거를 출입문 옆에 세워둔 유우시가 곧바로 문을 두드렸다.
에? 그때 가게 안쪽에서 뿌까 머리를 한 여자애가 뛰어나와 문을 열어준다. 여자애는 유우시의 어깨를 감싸안고 안쪽으로 사라졌다가 혼자 다시 나와 블라인드를 치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야?
도망간 수 잡으러 왔다가 바람난 수 목격해버린 마에다 리쿠는 집착싸패공으로 낯짝을 갈아끼웠다. 무표정일 때 그다지 친근한 인상이 아니라서 항상 허물어져 있는 얼굴부터 제대로 굳혔다. 거기다 치켜뜬 눈까지 매섭게 희번뜩거리자 두 배 정도 사나워졌다. 돌아버리게 더운 날씨. 미치기 딱 좋다. 다 죽자.
성큼성큼 걸어서 문 손잡이를 있는 힘껏 밀어버린 리쿠는 어떤 저항도 없이 가게 안쪽으로 불쑥 침입했다. 문이, 열려있었네. 그렇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이 문 열라고 지랄쇼 한바탕해야 하는데 예상과 달리 기름칠 잘 된 문이라 중심이 그대로 앞으로 무너졌다. 삐끗한 마루운동선수처럼 고꾸라진 리쿠는 앞구르기를 두 번하고 차디찬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하악!!!"
몸을 일으킬 겨를도 없이 너무 놀란 리쿠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 토, 토시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여긴 대만이잖아. 분명 익숙한데 기괴하고 섬뜩하기까지 한 얼굴. 밀가루를 뒤집어쓴 거처럼 하얀 얼굴의 토시오가 리쿠를 보고 활짝 웃기 시작한다. 만개한 치아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빨간 흔적들. 피...? 피!!! 흰자를 까뒤집고 몸을 부르르 떨던 리쿠의 시야가 그대로 블랙아웃 됐다.
***
죽은 거야? 아니, 살았어. 근데 왜 눈을 안 떠? 곧 깨어날 거야. 흑, 리쿠... 리쿠우... 나는 리쿠가 필요해... 화장 번져, 그만 울어. 화장 번져서 나 못생겨졌어? 아니. 그럼 어떤 거 같아? 평소랑 똑같아. 평소는 어떤데? 귀여워. 귀엽다는 건 못생기지 않았다는 건가? 어휴, 그래 너 잘 생겼다. 푸히힛.
원하는 대답을 고집스럽게 이끌어내는 슈크림처럼 달콤한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다. 반면 영혼 없이 대답하는 걸걸한 목소리는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다. 꿈인가.
근데 린... 리쿠 어디 많이 아픈 건가? 얼굴이 핼쑥해졌어. 아니.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너의 남친은 모든 것이 옳게 된 사람이다. 더위를 먹었을 뿐 괜찮다. 부럽구나 유우짱.
상대의 걸걸한 목소리에 영혼이 실리자 중저음의 바리톤처럼 중후했다. 유베날리스의 격언이 한편의 오페라 대사처럼 들리는 와중에 유우시의 목소리는 세상 가볍게 흩날린다.
"하오하오. 쎼쎼, 린따거."
아 뭐야 개웃기게. 언어는 기세야. 기세와 다정함이야. 외국인 꼬마와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우쭐해하며 말하던 유우시가 떠오른다. 어느 나라를 가든 미취학 아동의 언어 수준으로 말하지만 말투가 귀여워서 그런지 곧잘 먹히는 유우시였다. 굵직한 목소리를 따라 해보고 싶었는지 성대에 잔뜩 힘을 준 목소리가 웃겨서 빵 터질 뻔했다. 아아... 지금 웃으면 안 돼.
"근데, 네 남친 말이야. 깬 거 같은데... 안 일어나네."
"에? 진짜로?"
"아악! 아야얏."
일순 인중에 메다 꽂힌 벼락같은 따끔함에 리쿠의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눈이 퍼뜩 떠졌다. 확장된 시야 아래로 대바늘 같은 것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우와! 리쿠 깼다! 깼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신명나는 박수소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시커먼 손이 다가와 대롱대롱 거리는 바늘을 쏙 뽑아갔다.
"리쿠 괜찮아?"
코앞으로 쓱 나타난 얼굴에 겨우 잡은 정신줄을 또 놓칠 뻔했다. 흐익. 기겁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 리쿠의 손을 축축한 손이 주무르기 시작한다. 아... 이 익숙한 감촉.
"나야 나. 나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아이씨 깜짝아... 그 허연 밀가루칠이나 지우고 오던가. 슬그머니 다시 눈 뜨고 유우시의 얼굴을 확인하는데, 진짜 울긴 울었나 보다. 토시오 분장의 아이 메이크업이 번져 판다로 변한 데다 흰자도 핏발이 서 있었다. 리쿠가 한숨 돌리며 심장을 달래는 동안 마찬가지로 안도한 유우시가 이내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캄다운하던 리쿠의 심장이 또 경기를 일으킨다.
"너! 너어! 입에, 그거, 빨간 거."
"아, 토마토 껍질 꼈나 보다."
혀끝으로 치아를 요리조리 훑어내던 유우시가 다시 이~ 소리를 내며 고른 치아를 전부 보여준다. 끕딜 으딕드 끄이뜨? (껍질 아직도 껴있어?) 응, 송곳니 쪽. 아잇, 물로 헹구고 와야겠다.
유우시가 총총 뛰어서 어디론가 사라지자 금세 적막이 깔린다. 리쿠의 주변으로 편치 않은 공기가 흘러들었다. 왠지 스산한 느낌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뿌까 머리를 한 여자애... 그니까 여잔데. 여자였는데.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도 아니고. 멀리서 봤을 때는 여자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남자였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춘리 옷을 입고 쩍벌하고 있는, 다리털이 무성한 남자.
"와. 진짜로 잘생겼네요. 유우시가 망돌 사진 보여주면서 남친이라고 뻥치는 줄 알았는데... 저는 왕장린입니다."
"... 저는 마에다 리쿠입니다."
"오늘 우리 한거... 아, 왕한이라고. 제 형님이에요. 오늘 생일이라 깜짝파티하려고 유우시랑 같이 분장했어요. 마에다 군도 함께하시겠어요?"
"아아... 네네."
오해는 순식간에 풀렸다. TOMATO가 유우시의 단골 가게인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주인장들이라 타국에서 모국어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훅 치고 들어온 유우시가 그들에게 껌딱지처럼 들러붙은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런 유우시를 귀찮아하지 않고 꽤 아껴주면서 돌봐주고 있었다.
깜짝파티에서 리쿠는 긴 머리 가발만 썼다. 테이블 밑에 숨어있다가 두 사람이 먼저 놀래키고 나중에 나타난 리쿠가 또 한 번 놀래키는 게 계획이었다. 계획은 반쯤 성공했다. 두 사람한테는 놀라지 않던 한거가 리쿠에게는 깜빡 속은 것이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가동 중이었어도 두꺼운 천으로 둘러싸인 테이블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으니 땀이 질질 났다. 그 바람에 뒤집어쓴 가발이 얼굴로 죄 들러붙어 바야바 같았다.
식겁한 한거가 던진 숟가락에 마빡을 맞았지만, 빵 터져서 킥킥 웃던 유우시가 쥐가 났다고 옆구리를 부여잡는 통에 달려가서 풀어주느라 아픈지도 몰랐다. 정신없는 이벤트가 지나가고 리쿠는 작게 혹이 난 이마를 문지르며 넋을 놨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영혼이 탈탈 털렸다. 축하해 줘서 고맙다고, 밥해주고 싶다는 한거의 말에 유우시와 중앙 테이블에 앉았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뭐해줄까? 다 골라봐."
"뭐 고를 거 같아요?"
유우시의 말에 리쿠의 눈이 스르륵 감긴다. 역질문하면서 놀기 신청하는 유우시의 대화법을 아는지라 리쿠의 손이 유우시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볍게 쥔 얇은 손목을 엄지로 살살 쓸면서 적당히 하란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아까 깼을 때 들었던 장린과의 대화는 잘 넘어간 듯했어도 질려 하는 기색을 얼핏 느낀 터라 이 형제들이 유우시에게 그동안 어지간히 시달려 왔겠구나 대강 짐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화법을 완벽 마스터한 리쿠도 유우시 언어 영역 99점 맞을 때가 있는데. 저들은 쪽지시험 경험도, 비교 예시도 적지 않은가. 리쿠는 눈 감기 전 분명히 확인했다. 한거의 미간에 주름 세 개가 잡히는 것을.
쎄한 느낌의 오류는 빈번하지 않다. 동물적인 촉은 야생과도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휘되는 방어본능이다. 무시하는 것보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 밥은 좀 편하게 먹고 싶었는데. 리쿠의 머릿속으로 상황에 따른 대처법들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유우시와 있으면 종종 휘말리는 일이라 어렵지 않게 대비한다.
"딴삥?"
"땡!"
"미소탄탄면?"
"땡!"
"하, 마라우육면!"
"땡!"
아레레...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똥촉이었나. 아니 뭐야, 저 형님. 지금 즐기고 계시잖아? 별안간 눈앞에서 펼쳐진 메뉴 맞추기는 끊길 듯 말 듯 몇 번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평온하게 티키타카 중이거늘 리쿠는 한거의 표정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혼자 살얼음판 위를 걷는 중이다. 한거의 얼굴빛이 점점 붉어지고 있어서 동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우짱 너... 너무 땡을 남발하고 있는데. 적당히 하라고 제발.
"크잇! 나 안해안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던 한거가 소리치자 벌떡 일어난 리쿠가 바로 중재에 나섰다. 콧잔등을 찡긋, 눈웃음을 살살. 웃으면 백퍼 먹히는 유들유들한 웃음 달고 친근하게 형님 형님. 이 친구 지금 형님하고 대화하고 싶은 거예요. 친하고 편한 사람한테 놀아달라고 장난 잘 치거든요. 사랑 많은 친구라 형님한테도 애정 있는 거 느껴지시죠? 하하하. 화 푸시고 이해해 주세요. 음식은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다 잘 먹습니다. 리쿠는 유우시를 제 뒤로 숨긴 채 우리 아이 나쁜 아이 아니라고 변호하기 바빴다.
"흐음... 불닭, 훈! 툰!"
"......"
"딩~동~댕~!"
"......"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는 사람처럼 미간을 붙잡고 있던 한거가 루치아노 파바로티 톤으로 불닭훈툰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 가냘픈 목소리의 딩동댕이 리쿠의 뒤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야~ 남친 뭐야, 개뿜, 아니아니. 짱 설렌다 유우짱."
주방에서 국자 들고 빼꼼히 고개 내민 장린이 입술 주변 근육을 씰룩거리며 허공으로 연신 엄지척을 날려댔다. 이 인간들이 진짜.
"리큭, 여기 진짜 맛이썹. 푸흡."
안 봐도 지금 치아 18개 이상. 다리 뻗고 누울 자리 하난 기가 막히게 안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제 허리를 꼭 끌어안은 유우시의 손을 풀어내려는데 한거가 다가와 어깨를 툭툭 치며 귓가에 나직이 속삭인다. 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본다. 자기 와서 좋은가 봐. 그 말을 들은 리쿠의 손이 맥없이 탁 풀린다. 광대가 리프팅 되는 건 덤이다. 힘은 침대에서나 쓰고 열받은 건 식히면 그만. 전의 상실한 마에다 리쿠는 오늘도 패배한다. 지고서도 화나지 않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음식이 나올 동안 리쿠는 유우시만 쳐다봤다. 유우시는 식당 천장 봤다가 벽지 봤다가 소스 통 봤다가. 단골이라면서 꼭 처음 와본 관광객처럼 여기저기 시선을 준다. 대화 좀 해보려고 시동 거는데 음식이 또 금방 나왔다. 이타다키마스! 음식 나오고부터는 그릇에 코 박고 먹기만 한다. 매일 먹었을 음식인데도 맛있어 죽겠는지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천천히 먹어. 끄덕끄덕. 맛없는 거 먹을땐 리쿠를 반찬 삼아 먹는데 진짜 맛있는 거 먹을땐 눈길도 안 준다. 양껏 먹고 나면 볼록 튀어나온 윗배 쓰다듬으며 리쿠도 맛있게 먹었는지 꼭 확인한다. 리쿠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제대로 눈 마주치고 보고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못 봤어. 씹천사 얼굴.
음식은 전체적으로 유우시가 좋아할 만한 매운맛과 짭짤한 맛이 특징이었지만, 유우시가 따로 주문해 준 시오 주먹밥과 시그니처 메뉴인 토달볶은 리쿠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배고팠던지라 다 먹어치운 빈 그릇이 점점 늘어났다. 허기졌던 배를 가득 채웠더니 곤두서있던 신경이 누그러진다. 예민할 때마다 뭐 찾아 먹는 유우시가 단번에 이해됐다. 리쿠는 중년 남미새 아들맘의 눈을 하고 유우시를 쳐다봤다. 윗배를 둥글게 쓰다듬던 유우시도 눈을 홉뜨고 벌새 날개처럼 속눈썹을 파닥거리며 리쿠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대화했다. 여기 맛있지? 응. 진짜 맛있다.
"유우짱, 남친이랑 놀아. 형수님한테 너 쉴 거라고 말해놨어."
"에... 안 그래도 되는데..."
알고 보니 유우시가 근무하는 소품점도 한거의 아내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예쁨 받고 살았길래 먹을 거도 챙겨주고 일할 곳도 챙겨주고. 10년 동안 유우시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눈도 못 떼고 살던 리쿠는 상상도 못할 전개였다.
"그럼... 이만 나갈까?"
"응."
음식값을 지불하려다가 등 떠밀려서 쫓겨났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또 와. 네에-. 둘이 합창하듯 대답하면서 밖으로 튕겨 나왔다. 나오자마자 습한 무더위가 망토처럼 씌워진다. 리쿠 더우니까 차 타고 다니자. 유우시가 오늘 한 말 중에 가장 예쁜 말이다. 미리 불러 둔 건지 우버가 금방 도착했다.
"고마워. 와... 대만 너무 덥다. 넌 안 더워? 땀 많이 안 흘리는 거 보면 진짜 신기해. 근데 좀 시원한 나라로 다니지. 태국 갔다가 베트남 갔다가. 이번엔 대만이네. 왜 계속 더운 나라로만 다녀? 여기가 근데 최고 더운 거 같아."
우버를 타자마자 리쿠의 입이 터졌다. 더위 먹은 게 아직도 여전한 건지. 우리 지금 이 정도의 대화를 나눌 정도로 친근한 온도가 아닌데. 예열이 덜 되었단 자각은 있지만 입이 멈추질 않았다.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입안이 떫어지고 기분도 껄끄러워지고. 유우시가 리쿠를 쳐다보며 고저 없이 말했다.
"리쿠가 쫓아올까 봐."
오래된 연인 특, 서로의 표정만 봐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 이게 연애 3년 차 때는 참 쓸모 있고 좋았는데 지금은 영 쓸데없는 능력이다. 뻔뻔하지도 얄밉지도 않은, 누굴 골탕 먹일 때의 얼굴도 아니다. 딱 베이직한 얼굴. 오해한다면 그건 상대의 몫이니까 굳이 이해시키려 들지 않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부드럽게 굴러가는, 다정한 말들만 하는 사람이 토쿠노 유우시다. 싸울 때도 흥분에 못 이겨 날선 말이라도 할까 봐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 헤어지잔 말을 들었을 때도 느껴본 적 없는 건데.
리쿠는 이제껏 유우시가 했던 말들 중에 가장 서운한 말을 들었다.
To Be Continued... in the Collection Book
해당 작품의 2화는 추후 발매될 소장본에서 이어집니다.
